힐러리 퍼트넘
힐러리 화이트홀 퍼트넘(Hilary Whitehall Putnam, 1926년 7월 31일 ~ 2016년 3월 13일)은 현대 미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이다. 그는 1960년대 이래로 분석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특히 심리 철학, 언어 철학, 과학 철학 분야에서 활약했다.[1] 퍼트넘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자주 바꾼 것으로 유명하다. 심리철학에서, 퍼트넘은 마음의 다중 실현 가능성에 대한 그의 가설에 기초한 정신적, 육체적 상태의 유형 정체성에 대한 그의 주장과, 심신 문제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이론인 기능주의의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 철학에서 솔 크립키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는 인과적 지시 이론(en:causal theory of reference)을 개발하고, 독창적인 의미론을 만들어냈으며, 쌍둥이 지구라고 불리는 사고 실험에 기초한 의미에 대한 외재론의 개념을 도입했다. 수학 철학에서, 그와 그의 멘토인 윌러드 밴 오먼 콰인은 수학 실체의 실재론에 대한 논증을 개발했다. 인식론에서, 그는 "통 속의 뇌" 사고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형이상학에서, 그는 원래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지지했지만, 마침내 가장 노골적인 비판자가 되었다. 그가 "내재적 실재론"라고 부른 입장을 지녔고, 나중에 그것을 포기했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 내내 그는 과학적 실재론에 전념했다. 지각에 대한 철학에서 퍼트넘은 직접적인 실재론을 지지했다. 이에 따르면 지각적 경험은 외부 세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는 정신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적 표현, 감각 데이터 또는 다른 매개체가 없다고 한 번 더 주장했다. 그러나 또 철학적 입장을 바꾸었다. 그의 후기 작품에서, 퍼트넘은 미국의 실용주의, 유대교 철학, 그리고 윤리학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철학 전통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때때로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었는데, 특히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진보 노동당에 관여한 것으로 인해 더욱 그러했다. 사망 당시, 퍼트넘은 하버드 대학의 명예교수였다. 생애힐러리 퍼트넘은 1926년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새뮤얼 퍼트넘(Samuel Putnam)은 로망스어 학자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칼럼니스트였고, 어머니 리바(Riva)는 유대인이였으나 퍼트넘의 가족은 세속적이었다. 그의 가족은 힐러리가 태어난 직후 프랑스로 이주하여 1933년까지 살았으며, 퍼트넘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첫 언어가 프랑스어였다고 증언한다. 그는 1933년 필라델피아로 귀국하여 센트럴 고등학교(Central High School)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1년 후배인 노암 촘스키를 만나 일생의 친구이자 지적인 경쟁자가 되었다. 퍼트넘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진학하여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으며,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과정을 이수한 이후 1951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에서 논리실증주의파의 학자 한스 라이헨바흐의 지도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럼에도 퍼트넘은 논리실증주의를 자기부정적(self-refuting)이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애 동안 일관적이었다. 퍼트넘은 평생 동안 여러 차례 철학적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바꾸고 이전 견해를 비판하면서 자기자신의 철학적 적대자가 되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퍼트넘은 노스웨스턴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MIT를 거쳐 1965년부터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했다. 그는 1962년 철학자 루스 애나 퍼트넘(Ruth Anna Putnam)과 결혼했다. 이들은 어린 시절 경험한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전통적인 유대교 가정을 만들고자 하여, 뒤늦게 유대교 의식과 히브리어를 공부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퍼트넘은 미국 민권 운동을 적극 지지했고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65년 하버드로 이직한 이후 그는 캠퍼스 시위를 조직하거나 마르크스주의 강좌를 열기도 했다. 그는 민주사회학생회의 일원이었고, 1968년부터는 진보노동당(PLP)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하버드 행정부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그는 1972년 진보노동당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나중에 1997년 알링턴 스트리트 교회(Arlington Street Church)에서 열린 전 반징집 운동가 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과거 PLP 활동이 실수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퍼트넘은 급진적인 과거와 결별하면서도 학자들이 사회에 대해 특별한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념은 버리지 않았다. 그는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방법"(1983)과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1993)이라는 논문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도 직설적이고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1976년 퍼트넘은 미국철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그는 논리학과 수학철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월터 베벌리 피어슨 수리논리학 교수로 선출되었다. 퍼트넘은 영국 학사원의 통신 펠로우였으며, 1999년에는 미국철학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2000년 6월 교직에서 은퇴하고[2] 하버드 대학교의 코건 대학 명예교수(Cogan University Professor Emeritus)가 되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유대교나 19세기 말 실용주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이 주제들에 관한 여러 에세이와 책을 출판했다. 퍼트넘은 2016년 3월 13일 매사추세츠 주 알링턴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같이 보기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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