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루노
![]() ![]() 벨루노(이탈리아어: Belluno, 라딘어: Belum 베네토어: Belùn)는 이탈리아 북동부 베네토주의 도시이다. 베네치아에서 북쪽으로 약 100 킬로미터 (62 마일) 거리에 위치한, 벨루노는 벨루노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돌로미티 동부 지역에서 가장 핵심 도시이다. 약 거주 인구 36,000명을 지닌 이곳은 발벨루나 지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다. 돌로미티 벨루네시 국립공원에 위치한 15개 지자체 중 하나이다. 지리오래된 도시인 벨루노는 피아베강과 아르도 급류가 합류하는 곳 근처 절벽의 돌출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돌로미티 산맥에 속하는 스키아라산이 위치해 있고, 도시 위쪽으로 유명한 '구셀라 델 베스코바'(주교의 바늘), 세르바산, 탈베나산 등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프레알피 베네테가 벨루노를 베네치아 평야와 구분하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스키 리조트 지역인 카스티오네세 (Castionese)에 위치한 네베갈이 존재한다. 역사도시의 이름은 '빛나는 언덕'을 뜻하는 켈트어 '벨로두눔'(belo-dunum)에서 유래했다.[2] 벨루노가 된 지역의 인구는 주로 베네티인이었고, 그 가운데 강력한 소수 집단으로 켈트인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로마인들이 알프스쪽으로 북진하면서, 켈트인들은 떠나가거나 흡수되었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기원전 225년 갈리아인들과 분쟁 시에 로마인들과 우애의 맹세를 맺었고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한니발이 침공했을 때도 이 맹세를 지켰다. 기원전 220-200년경에 성립된 로마의 초기 영향력은 군사적이고 상업적인 것이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했던 이곳은 남쪽의 도시들을 보호하였다. 벨루노는 또한 철과 구리 공급처가 되기도 하였다. 이미 로마의 영향권 안에 있던 이곳은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 공화정의 사법적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통합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죽고 아우구스투스가 즉위한 그 사이 시기, 벨루눔은 로마의 무니키피움이 되었고 거주민들도 '파피리아'(Papiria) 부족 신분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 시기, 이곳은 제10 구역 베네티아 에트 히스트리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의 시민들에는 Caius Flavius Hostilius와 그의 부인 Domitia가 있었으며, 이들의 3세기에 만들어진 사르코파구스가 산 스테파노 교회 옆에 있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랑고바르드족 (6세기)과 카롤링거 왕조 (8세기)의 지배를 받았으며 대영박물관의 그 유명한 벨루노 매장물이 이 시기의 것이다. 9세기 말부터 주교후의 통치를 받아 성벽이 생겼다. 이후에 이곳은 기벨린 파의 에첼리노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벨루노는 오랫동안 트레비소와 인접 지역을 놓고 경쟁했으나, 결국 파도바 전쟁 (1404년) 중 베네치아 공화국에 귀속되었다. 그때부터 벨루노는 카도레 지역의 목재를 피아베강을 통해 운송하는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다. 1797년까지 베네치아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3] 베네치아 공화국의 멸망 이후, 벨루노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1866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벨루노 대성당은 1873년 알파고 지진 당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종탑은 굳건히 서 있었다.[3] 주요 볼거리
기후벨루노는 냉대 습윤 기후 (쾨펜의 기후 구분: Dfb)이다. 평균 연중 기온은 10.8 °C (51 °F)이고, 평균 연간 예상 강수는 1,128 mm (44 in)이다.
교통국도가 벨루노에서 펠트레, 트레비소, 폰테넬레알피, 비토리오베네토로 이어진다. 스타치오네 광장(Piazzale della Stazione)에 있는 벨루노역은 칼라초-파도바 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역사는 1912년에 문을 열었으며, 1886년에 더 일찍이 문 연 역을 대체하였다. 건축가 로베르토 나르두치가 설계한 역사의 승객실은 1928년에 만들어졌다. 버스역 역시 기차역 옆 스타치오네 광장에 있다. 출신 유명 인물
국제 관계벨루노는 다음 도시와 자매 도시이다: 같이 보기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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