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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헨리 8세
Henry VIII
헨리 8세 초상화
헨리 8세 초상화
잉글랜드의 군주
잉글랜드의 군주
잉글랜드 국왕
재위 1509년 4월 21일~1547년 1월 28일
대관식 1509년 6월 24일
전임 헨리 7세
후임 에드워드 6세
아일랜드 국왕
재위 1542년-1547년 1월 28일
전임 (신설)
후임 에드워드 6세
아일랜드 영주
재위 1509년-1542년
전임 헨리 7세
후임 (폐지)
웨일스 공
재위 1502년 4월 2일-1509년 4월 21일
대관식 1504년 2월 18일
전임 아서 튜더
후임 에드워드 튜더
군주 헨리 7세
콘월 공작
재위 1502년–1509년
전임 아서 튜더
후임 헨리 튜더
요크 공작
재위 1494년–1509년
전임 슈루즈베리의 리처드 플랜태저넷
후임 찰스 스튜어트
잉글랜드 잉글랜드원수백
재위 1494년–1509년
전임 버클리 후작
후임 노퍽 공작
잉글랜드 잉글랜드오항총독경
재위 1493년–1509년
전임 윌리엄 스콧
후임 에드워드 포이닝스
신상정보
가문 튜더
부친 잉글랜드의 헨리 7세
모친 요크의 엘리자베스
배우자 아라곤의 캐서린
앤 불린
제인 시모어
클리브즈의 앤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아
자녀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
콘월 공작 헨리
종교 천주교잉글랜드 성공회
서명

헨리 8세(Henry VIII, 1491년 6월 28일 ~ 1547년 1월 28일)는 헨리 7세 뒤를 이은 잉글랜드 국왕이다. 튜더가로서는 두 번째 국왕이었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에 이르는 결혼과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불화 끝에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분리 독립 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헨리 8세는 교황 수위권에 대항하기 위해 왕권신수설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제군주로서 행동하였다. 종종 반대자에게 정치적 반역 혐의와 함께 이단 혐의를 씌웠고, 사권박탈법으로 피의자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여 정식 재판 없이 처형하였다.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 두드러진 인물을 총리로 두어 통치하였으나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때는 추방하거나 처형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로마 교황청으로 가던 교회의 수입 상당수가 왕실로 향하게 됨으로서 헨리 8세는 유래없는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비효율적 국정 운영, 막대한 비용을 들인 전쟁 등으로 재정 사정은 좋지 못하였고 종종 파산 위기를 겪었다.

1535년과 1542년 웨일스 법을 통해 웨일스를 잉글랜드의 하위 구역으로 완전히 통합하였고, 1542년 아일랜드 군주법을 통해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아일랜드가 독립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은 자동적으로 아일랜드의 국왕을 겸임하였다.

당대 사람들은 헨리 8세를 매력적이나 야욕이 강한 카리스마 넘치는 통치자로 여겼다.[1][2] 그는 스스로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며 다재 다능한 면모를 과시하였고 각종 스포츠와 게임, 도박 등 활동에도 열정을 보였다. 젊어서는 탄탄한 몸매를 지녔으나 점차 체중이 늘어 중년이 되자 심각한 과체중과 함께 여러 질병을 앓았다. 말년의 헨리 8세는 종종 음탕하고 이기적이며 편집증적인 폭군으로 묘사된다.[3] 헨리 8세 사망 이후 당시 아홉살이었던 에드워드 6세가 후계를 계승하였다.

생애

출생과 성장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와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자녀로[4] 위로 형 아서 튜더와 누나 마거릿 튜더가 있었고 동생으로 메리 튜더가 있다.[5]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예닐곱의 아이를 낳았으나 당시 유럽은 일반적으로 영아사망율이 매우 높았고 헨리 8세의 형제들 역시 다수가 어릴적 사망하여 이 4 남매만이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을 수 있었다. 1491년 6월 28일 켄트주 그리니치플라센시아궁에서 태어난 헨리 8세는 작은형제회 수도원에서 엑서터 주교인 리처드 폭스에게 세례를 받았다.[6]

영아 사망의 위험을 넘겨 두 살이 된 1493년부터 헨리 8세는 국왕의 적자로서 도버 파수경, 육군 원수, 아일랜드 주둔군 부사령관 등의 여러 작위에 책봉되었는데 군사와 관련한 직위는 실제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실의 관례에 따른 명예직이었다. 가장 중요한 작위는 요크 공작이었는데 이 역시 적장자인 아서 튜더에게 내려진 웨일스 공과 함께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관례적 작위이다. 1495년 5월 가터 훈장이 수여되었는데 당시 이러한 작위와 훈장의 수여는 그에 따른 연금을 지급함으로써 왕족 개개인에게 독립적인 자금을 수여하는 의미가 있었다.[7]

헨리 8세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형 아서가 왕위를 이을 것으로 여겨져 별 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고 그에 따라 어린 시절의 기록 역시 많지 않다.[8] 그는 여느 왕족과 같이 어려서부터 인문학과 언어를 배웠으며 라틴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이탈리아어도 어느 정도 구사하였다.[9][10]

1501년 11월 형 아서 튜더와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의 결혼식이 있었다. 카탈리나는 이제 막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의 연합으로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던 스페인 이사벨 1세의 딸로 헨리 7세는 양국의 동맹을 위해 이 결혼을 추진하였다. 헨리 8세는 요크 공작으로서 아버지 헨리 7세의 최측근으로 이 결혼식에 참석하였다.[11]

1502년 카탈리나와 결혼한 지 20주에 불과하였던 형 아서가 사망하였다.[12] 장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아버지였던 헨리 7세에게 큰 충격이었고, 헨리 7세는 차남 헨리 8세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식 후계자로 지명하는 것조차 서두르지 않았다. 아서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1504년 콘월 공작웨일스 공의 지위를 포함한 모든 권리가 헨리 8세에게 계승되었고, 차남이었던 헨리 8세는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13] 그 때까지도 별다른 왕위 계승을 위한 교육은 없었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헨리 8세를 "제왕학을 배우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를 계승하게 된" 왕자로 묘사하였다.[14]

아서 튜더가 사망하자 헨리 7세는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에도 위기를 맞았다. 남편이 사망하여 홀 몸이 된 카탈리나가 귀국하고자 할 경우 막을 명분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 7세는 아서를 대신하여 왕위계승자가 된 헨리 8세를 카탈리나와 결혼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15] 이러한 결정은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역시 동의하였고[16] 1503년 6월 23일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약혼하였다.[17] 당시 열셋 나이의 헨리 8세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양국의 군주는 정략 결혼을 밀어붙였다.[18]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공동통치자였던 페란도 2세는 단독으로 스페인의 군주가 되었지만 이사벨 1세의 딸로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카탈리나는 골치거리였다. 페란도 2세는 카탈리나를 잉글랜드에 영구적으로 주재하는 대사로 임명하여 사실상 스페인 귀환을 막았다. 이듬해 열네살이 된 헨리 8세는 한 때 형수였고 나이차도 컸던 카탈리나와 결혼하기 싫다고 거부하였지만 헨리 7세는 아들의 뜻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한편 카탈리나 역시 이 결혼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미 스페인 귀국이 불가능해 진 시점에서 헨리 8세와 재혼을 "신이 주신 숙명"으로 여기기로 마음 먹었다.[19]

1506년 2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는 차기 잉글랜드 국왕이 될 것이 확실해진 헨리 8세에게 황금양모 기사 작위를 수여하여 양국의 우호적 관계를 희망하였다.[20]

즉위 초기

메인나트 웨윅이 그린 1509년 무렵 헨리 8세의 초상화

1509년 4월 21일 아버지 헨리 7세가 사망하자 헨리 8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5월 10일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이루어진 즉위식에서 헨리 8세는 그간의 태도를 바꾸어 형수인 카탈리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헨리 8세의 파혼에 대비하여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와 결혼을 통한 동맹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헨리 8세의 이러한 태도 변화로 실패하였다.[21] 왕세자 시절 형과 결혼한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라고 교황청에까지 탄원하였던 헨리 8세의 결혼 반대는 이 선언으로 공식적 판단 없이 종결되었지만, 훗날 헨리 8세가 파혼을 결심할 때 다시 들고 나오는 명분이 된다. 헨리 8세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결혼한다고 주장하였는데[22]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의 입장 변화를 설명하기에 좋은 방안이었다. 헨리 8세와 카탈리나는 1509년 6월 11일 그리니치의 수도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23]

1509년 6월 23일 헨리 8세는 막 결혼한 카탈리나를 대동하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가졌다.[24] 카탈리나는 스페인의 페란도 2세에게 "연일 이어지는 축제 속에 지내고 있다"고 편지를 썼다.[25]

대관식 이후 정식으로 잉글랜드를 통치하게 된 헨리 8세는 아버지 시절 장관이었던 리처드 엠슨과 에먼드 더들리를 반역죄로 처형하였는데, 이는 훗날 자신의 의사에 반하는 신료를 반역으로 몰아 축출하는 헨리 8세의 전형적인 지배 전략의 단초를 보여준다.[26] 리처드 엠슨과 에먼드 더들리는 헨리 7세 시기 국왕이 축출을 원하는 고위 귀족에게 형벌 채권을 발행하여 이들을 몰락시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형벌 채권은 반역 등의 혐의에 대해 재판 없이도 채무를 부가할 수 있는 방법으로 헨리 7세는 이를 귀족들에 대한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였지만, 단지 국왕의 눈 밖에 났다는 이유 하나로 일순간에 재산이 몰수되고 가문이 몰락하는 형벌 채권에 대한 귀족의 반발은 컸다. 헨리 8세는 이를 두 장관의 전횡 탓으로 돌려 아버지의 허물을 감추면서 동시에 불만이 팽배하였던 귀족들을 달랠 수 있었다. 헨리 8세는 리처드 엠슨과 에먼드 더들리를 굶주린 늑대 우리에 던져 넣는 잔혹함을 보였다.[27]:277-278

한편 장미 전쟁 이후 몰락하였으나 여전히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였던 요크가에 대해서는 아버지보다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대했다. 헨리 8세는 토머스 그레이를 비롯하여 투옥되어 있던 요크가 인물들 다수를 석방하고 사면하였다.[28] 헨리 8세의 이러한 관용은 당연히 댓가가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보일 만한 인물들을 선별적으로 골라 사면하였고, 그렇지 않았던 에드워드와 리처드 드라폴 형제는 결국 참수하였다.[29]

카탈리나는 결혼 직후 임신하였으나 1510년 1월 31일 딸을 사산하였고 4개월 쯤 지나 다시 임신하였다.[30] 1511년 1월 1일 첫 아들이 태어나자 헨리 8세는 크게 기뻐하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이름 헨리를 물려주며 콘월 공작의 작위를 내렸다. 그러나 콘월 공작 헨리는 태어난 지 두 달을 지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31] 이후로도 카탈리나는 1513년과 1515년에도 아이를 사산하였고 1516년 2월 딸 메리를 낳았다. 연이은 사산으로 소원해졌던 헨리 8세와 카탈리나의 사이는 메리의 출생으로 약간이나마 개선되었다.[32]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원만하게 지냈다고 알려져 있으나, 헨리 8세 역시 정부를 두었다.[33] 헨리 8세의 정부로는 앤 헤이스팅스[34]와 엘리자베스 블라운트[35] 같은 사람들이 거론된다. 특히 엘리자베스 블라운트는 1516년부터 약 3년 동안 헨리 8세의 정부 노릇을 했다. 당시 유럽의 남성 고위 귀족이 결혼한 아내 외에 정부를 두는 것은 일반적이었으며 헨리 8세의 경우는 오히려 정부의 수가 적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36][37] 헨리 8세가 얼마나 많은 정부를 두었는 지는 명확치 않아 소수의 몇 명이었다는 설에서 부터[38] 제법 많은 수였다는 설까지[39] 의견이 분분하다. 카탈리나는 헨리 8세가 정부를 두는 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1518년 카탈리나는 또 다시 여아를 사산하였고[40] 1519년 블라운트는 헨리 8새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를 낳았다.[41] 헨리 8세는 1925년 헨리 피츠로이를 자신의 아들로 공인하고 리치몬드 공작의 작위를 부여하였다.[42] 일반적으로 사생아에게는 왕위계승권이 부여되지 않지만 카탈리나와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헨리 8세는 만약을 대비하여 리치몬드 공작에게 계승권을 부여하는 왕위계승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었다.[43]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1536년 7월 리치몬드 공작이 25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며 무산되었다.[44]

여섯 아내들과의 관계

헨리 8세
여섯 왕비
카탈리나 다라곤 왕녀
앤 불린
제인 시모어
아나 폰 클레페 공녀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

헨리 8세는 아버지 헨리 7세의 차남으로 원래는 형인 아서 튜더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었으나, 아서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헨리 8세의 첫 아내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는 형 아서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아서가 사망한 뒤 스페인과의 지속적인 동맹을 원하였던 헨리 7세의 뜻에 따라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1509년 왕위 계승과 함께 이루어진 결혼 당시 헨리 8세는 17세, 카탈리나는 24세로 나이 차이가 꽤 있었으나 금슬은 나쁘지 않았다. 카탈리나는 몇 차례의 유산 끝에 1511년 콘월 공작 헨리를 출산하였으나 첫 아들은 생후 1개월을 넘지기 못하고 사망하였고 이후 장녀 메리 1세를 낳은 뒤 몇 차례의 임신도 유산하다 폐경을 맞았다.

잉글랜드는 12세기 수 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던 마틸다의 사례를 제외하면 여성이 군주가 된 전례가 없었고, 여왕이 즉위하여 결혼하면 튜더가의 명맥이 끊길 것을 우려하여, 헨리 8세는 후계를 이을 아들을 간절히 원했다. 또한 헨리 8세는 프랑스의 왕위계승권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살리카법을 근거로 여성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있던 프랑스 왕좌에 대한 야망을 위해서라도 후계자는 아들이 되어야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탈리나가 폐경으로 더 이상 자녀를 가질 수 없게 된 일은 헨리 8세에게는 매우 중대한 위기로 다가왔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파혼하고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젊은 여성과 재혼하고자 하였다. 당시 유럽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결혼을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여야만 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갖가지 예외를 들어 결혼을 무효화함으로써 이혼의 길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 역시 교황청의 승낙을 얻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자 하였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가 이미 형인 아서 튜더와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과 한 결혼은 무효라는 주장을 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수장령을 통해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 독립하는 강경한 대립을 통해 원하는 바를 강행하였다. 이에 교황청 역시 헨리 8세를 파문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이후 헨리 8세는 앤 불린, 제인 시모어, 클레페 공녀 아나,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 등의 아내를 맞았다. 앤 불린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나 헨리 8세와 불화 끝에 반역과 간통 혐의로 처형되었고, 제인 시모어는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으나 산욕열로 출산 직후 사망하였다. 클레페 공녀 아나는 토머스 울지가 협상 끝에 잉글랜드로 오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혼하였으며, 캐서린 하워드는 불화 끝에 처형되었다. 헨리 8세는 말년에 이르러 맞이한 캐서린 파와는 비교적 원만한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 사망 이후 제인 시모어의 혈육인 토머스 시모어와 재혼하였다.

카탈리나 다라곤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

헨리 8세는 카탈리나의 시녀였던 메리 불린을 정부로 두었고 메리가 낳은 두 자녀 헨리 케리캐서린 케리는 헨리 8세의 사생아로 짐작되었지만, 헨리 피츠로이의 경우와 달리 헨리 8세는 이 둘을 자신의 자녀로 인정하지 않았다.[45] 1525년 마흔이 된 카탈리나가 폐경을 맞아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자[46] 간절히 아들을 원하던 헨리 8세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다.[47][48]

당시 헨리 8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번째 방법은 엘리자베스 블라운트와 사이에서 태어난 헨리 피츠로이를 후계로 지명하는 것이었다. 헨리 피츠로이는 사생아로서 유산이나 승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아버지가 사생아를 공식적인 아들로 인정하고 후계자로 세우는 것은 드물지만 가끔 이루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실제로 헨리 피츠로이의 후계 지명을 시도하였으나 피츠로이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두번째 방법으로는 카탈리나와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메리를 혼인시켜 손자를 낳으면 왕위를 손자에게 주는 것이었지만, 메리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손자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카탈리나와 파혼하고 새 왕비를 맏는 방법이 있었는데, 서른 넷으로 아직 건장한 청년이었던 헨리 8세는 파혼과 재혼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선택하였다.[49]

비록 유럽에서는 이미 종교개혁이 한창이었지만,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파혼이 가톨릭과 갈등을 일으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교황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까지 벌이며 교황 레오 10세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50] 칭호까지 받은 그는 교황 수위권에 도전할 이유가 없었다.[51] 당시 유럽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결혼을 배우자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여야만 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으나 실제로는 갖가지 예외를 들어 결혼을 무효화함으로써 이혼의 길을 열어두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 역시 교황청의 승낙을 얻어 카탈리나와의 결혼을 무효로 선언하고자 하였다. 헨리 8세가 언제부터 파혼을 결심하였는 지는 확실치 않으나 1527년 무렵이 되면 카탈리나가 "신이 보시기에 황폐한" 상태로 더 이상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52]

제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추한 짓이다. 그것은 제 형제의 부끄러운 곳을 벗긴 것이므로 그가 후손을 보지 못하리라.
— 레위기 20장 21절

헨리 8세는 즉위 전 카탈리나와 결혼을 거부하던 때의 논리를 다시 들고 나와 카탈리나는 형 아서 튜더와 이미 결혼하였기 때문에 자신과의 결혼은 무효라 주장하였다. 토머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파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레위기 20장 21절을 신학적 근거로 내세웠는데[53], 이러한 주장은 로마 가톨릭뿐만 아니라 마르틴 루터에게도 반박되었다. 루터는 성서가 차라리 중혼을 허용할 지언정 헨리 8세와 같은 이유로 파혼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하였다.[54] 이는 훗날 헨리 8세가 루터 교회가 아닌 독자적 행보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를 수녀원으로 보내고 이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파혼을 단호히 반대하고 나서자 공개적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55] 메디치가 출신인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가 벌이는 이탈리아 패권 경쟁에서 기존의 동맹 관계를 바꾸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가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로마가 포위되는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스페인의 결별을 의미하는 헨리 8세의 파혼을 선듯 인정하기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헨리 8세는 자신이 이미 작성한 교황의 교서 초안을 보내며 승인을 촉구하였는데 이 역시 여러모로 위태로운 상황에 있던 교황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발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56] 가톨릭 입장에서 성서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교황 고유의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1528년 로렌초 캄페지오가 교황의 특사로 런던에 파견되어 파혼 심판을 맡았고, 클레멘스 7세의 의도에 따라 헨리 8세의 파혼을 불허하였다.[57] 1529년 7월 로마에서 다시 열린 심판에서도 교황의 결심은 확고하여 파혼이 허락되지 않았고 헨리 8세는 분노하여[58] 추기경이자 총리였던 토머스 울지에게 책임을 물었다.[59] 헨리 8세 즉위 이후 최측근으로서 대내외 정무를 처리하던 울지는 "갑작스럽고 총체적인 총애의 철회"에 당혹스러워 하였다.[60] 헨리 8세는 결국 토머스 울지를 반역죄로 몰았고 울지는 재판을 기다리다 사망하고 만다.[61][62] 헨리 8세는 잠시 직접 정부를 이끌다[63] 새로운 추밀원 수장으로 토머스 모어를 선택하였다. 토머스 모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파혼 문제에 대해서는 헨리 8세를 지지하였다.[64] 토머스 모어에게는 울지가 실패하였던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가 주어졌다. 교황에게는 국왕의 파혼 승인을 설득해야 하였고 헨리 8세에게는 가톨릭 잔류를 설득해야 하였던 것이다.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파혼 문제로 교황청과 지리한 협상을 이어갔으나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협상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헨리 8세는 결국 독단적 행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시기 헨리 8세는 이미 메리 불린의 동생 앤 불린과 내연 관계에 있었다. 1532년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위 성직자인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워햄이 사망하자 헨리 8세는 교황의 주교 서임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파혼 주장을 옹호하여 왔던 토머스 크랜머를 그 자리에 임명하였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 일은 중세 시기부터 반복되어 온 서임권 투쟁의 하나로 보였다. 1533년 독단으로 파혼을 결정하고 카탈리나를 출궁시키고 앤 불린과 재혼하자[65] 헨리 8세와 로마 교황청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헨리 8세는 교황은 그저 로마의 주교일 뿐이며 잉글랜드 교회는 그와 분리된 독자적인 교회라 선언하고 잉글랜드의 군주가 교회의 수장을 겸하는 수장령을 선포하였다.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파혼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교회의 분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이를 반대하다 처형되고 만다. 한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랜머를 파문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앤 불린

앤 불린

1532년 겨울 헨리 8세는 칼레에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만나 자신의 재혼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였다.[66] 이제 마흔 하나의 나이가 된 헨리 8세는 프랑스의 협조를 확인한 뒤 도버로 돌아와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하였고[67], 얼마 지나지 않아 앤 불린은 임신하였다. 적장자의 출생 가능성이 임박하자 헨리 8세는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카탈리나와의 파혼을 공식화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고자 하였다.[68]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런던에서 앤 불린과 공식적인 결혼식을 올렸고[69] 6월 1일 새로운 여왕으로 선포되었다.[70] 앤 불린은 9월 7일 딸을 출산하였다. 헨리 8세는 적잖이 실망하였지만 아직은 30대 초반이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접지는 않았다. 앤 불린이 출산한 딸은 헨리 8세의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따라 엘리자베스라고 이름을 지었다.[71]

헨리 8세는 앞으로 태어날 것이라 기대되는 아들을 위해 왕위계승법을 정비하였다. 카탈리나와 결혼이 무효이므로 장녀 메리는 사생아로 격하되어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합법적 결혼"으로 왕비가 된 앤 불린이 낳게 될 아들이 최우선 계승권을, 만일 아들이 없을 경우 이제 갖 태어난 엘리자베스가 차순위 계승권을 지니게 되었다.[72]

헨리 8세의 갑작스런 수장령은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샀지만 헨리 8세는 토머스 모어를 비롯한 고위 신료나 귀족, 존 피셔와 같은 성직자를 막론하고 반대자를 처형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73]

헨리 8세는 카탈리나와 공식적인 파혼 이전에 이미 앤 불린과 내연 관계에 있었다. 언니인 메리 불린이 헨리 8세의 정부였으므로 헨리 8세는 앤 불린 역시 정부로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앤 불린은 정식 결혼을 요구하였고 헨리 8세가 다른 정부를 두는 것에도 분노를 보였다. 앤 불린의 이런 성격은 헨리 8세가 만만치 않은 여파를 무릎쓰고 수장령을 선포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혼외 관계였을 때는 매혹적으로도 보였을 앤 불린의 성격은 결혼 후 헨리 8세에게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헨리 8세는 여전히 다른 정부와 관계를 가졌고[74] 앤 불린은 이 때문에 크게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고 격노하였다. 앤 불린의 이런 행동은 공식 의전에서도 종종 표출되어 많은 적을 만들었고, 헨리 8세는 점차 염증을 느꼈다. 1534년 앤의 임신이 상상임신 혹은 유산으로 끝나자 그 해 말 헨리 8세는 캔터베리 대주교 크랜머와 총리 토머스 크롬웰을 불러들여 앤과 파혼할 방법을 의논한다.[75] 그러나 카탈리나를 다시 왕비로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1536년 1월 8일 아라곤 왕녀 카탈리나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장녀 메리가 병문안 한 번 허락받지 못하고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사이 헨리 8세는 카탈리나의 사망에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다음날 헨리는 노란색 옷을 입고 모자에는 흰색 깃털을 달아 장례가 아니라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였다.[76] 앤 불린은 다시 임신하였다. 이번에도 아들이 아닐 경우 자신의 처지가 어떻게 될 지 앤 불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달 말무렵 헨리 8세는 마상 토너먼트를 즐기다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했다. 1536년 1월 29일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앤 불린은 심리적 충격으로 유산을 하였다. 태아는 남자였다.[77] 이 일은 앤 불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78]

1536년 10월 가톨릭 복귀를 요구하는 은총의 순례 운동이 일어났다.[79] 농민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잉글랜드 북부 전역으로 번졌으며 일부 귀족들이 합세하여 2만 - 4만 명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80] 헨리 8세는 그들의 요구를 숙고하겠다고 약속하였지만, 반란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말을 들은 농민들이 해산하자[81] 곧바로 주도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였다.[82] 헨리 8세는 2백 여 명을 처형하였다.[83]

불린가는 추밀원에서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을 포함하여 많은 적들이 있었다. 당시 추밀원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를 두고 갈라져 있었는데 이는 헨리 8세 스스로의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 탓이 컸다. 불린가는 잉글랜드의 동맹 상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호하였지만 핸리 8세가 프랑스와 동맹을 추진하면서 영향력이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84] 장녀 메리가 어엿한 성인인 스무 살이 되자 추밀원 일각에서는 부녀 사이의 화해를 요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예전부터 카탈리나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린가와 적대하기 위한 명분을 찾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총리이자 프랑스와 동맹을 추진한 토머스 크롬웰이 불린가 반대의 핵심이었다.[85][86]

앤 불린의 몰락은 예견된 일이었지만 급작스럽게 진행되었다. 헨리 8세는 이미 내연 관계에 있던 정부 제인 시모어의 처소를 궁전 안으로 옮겨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고[87], 앤 불린의 동생 존 불린에게 수여하기로 되어있던 가터 훈장을 취소하고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