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폴란드 공화국(폴란드어: Rzeczpospolita Polska 제치포스폴리타 폴스카[*], 문화어: 뽈스까)은 중앙유럽에 있는 국가이다. 국토의 면적은 312,696km2이며 16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다. 인구는 약 3,850만 명 정도로 유럽 연합 내부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기도 하다.[6] 폴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바르샤바이며, 그 외에 크라쿠프, 우치, 브로츠와프, 포즈난, 그단스크, 슈체친 등이 주요 도시이다. 지리폴란드는 영토가 상당히 광대하여 북쪽으로는 발트 해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카르파티아산맥에 접하고 있다. 북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월경지인 칼리닌그라드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슬로바키아와 체코, 서쪽으로는 독일이 자리하고 있다. 역사폴란드에는 몇 천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고대 후기에 이르자 수많은 문화권들이 공존하는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슬라브 계열의 폴인이 점차 우세를 점하였고, 이들이 지역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지역의 이름도 ‘폴란드’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현 폴란드의 역사는 966년 경, 당시 폴란드 지방이 마침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을 때부터 시작한다.[7] 1025년에는 폴란드 왕국이 세워졌으며, 1569년에는 루블린 연합으로 리투아니아와 합병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세우며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강대국들 중 하나로 군림하였다. 또한 1791년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5월 3일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8]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도 시간이 흐르자 과거의 영화가 퇴색하기 시작하였으며, 18세기 말에 이르자 인근의 주변국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1918년에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을 되찾았으며, 몇몇 영토 분쟁을 거친 뒤에는 유럽 정치의 핵심적인 축을 담당하게 된다. 1939년 9월에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이 시기에 3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60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사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9] 한편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폴란드는 소련 주도의 동구 공산권에 편입되었으며 새롭게 세워진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주도국으로 참여하며 냉전을 더욱 심화하는 데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공산주의가 균열의 조짐을 보이고, 냉전이 종결되자 결국 공산주의 정권도 무너지며 폴란드는 대통령제 민주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된다. 냉전이 종식된 후에는 미국과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제력폴란드는 꽤나 발전한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10] 중앙유럽에서는 지역강국으로 분류된다. 명목 GDP로는 유럽 연합 내에서 6번째로 거대한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PPP로 따질 때에는 5번째로 거대하다. 또한 삶의 질, 치안, 경제적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축에 속하며, 대학 교육과 공중 의료보험 체제도 EU 기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편이다.[11] 총 16개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폴란드는 솅겐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UN, NATO, OECD, 비셰그라드 그룹의 일원이기도 하다. 국명국명 ‘폴란드’의 폴란드어식 표기는 'Polska'이다. 이 이름은 6세기 즈음에 오늘날 폴란드의 바르타 강 근처에 정착하여 살아갔던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부족들 중 하나인 ‘폴인(Polanie)'의 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폴‘이라는 단어는 ’들판‘이라는 뜻의 슬라브조어에서 유래한 것이다.[12] 헝가리나 리투아니아, 페르시아, 러시아, 터키 등지에서는 폴란드를 'Lędzianie'라고 부르는데, 이는 현 폴란드 남동부 지방에 거주했던 렌디아인들에서 따온 것이며, 이 부족의 이름도 폴란드 고어로 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레다‘에서 유래된 것이다. 역사선사 시대폴란드에서는 대략 기원전 2400년부터 청동기가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750년 경에는 철기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폴란드 지역에서 루사티아 문화가 발전하였으며, 청동기와 철기에 걸쳐 발전하면서 폴란드 지역에서 번영을 이루었다. 이시기의 가장 유명한 폴란드 유적들 가운데에는 비스쿠핀에 있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대략 기원전 748년 경의 목조 요새 유적이라고 전한다.[13] 고대 시기에 현재 폴란드 지방에는 수많은 고대 부족들이 몰려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기원후 400년에서 500년에 이르자 켈트족, 스키타이족,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인, 슬라브인 등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심지어 로마 군단의 기지까지 발견되면서 고대 로마의 문명권 내부에도 속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아마 이 로마 군단은 호박을 채취하러 나간 로마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이 곳에 살던 슬라브인 등 여러 민족들은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그 생활상을 자세히 복원할 수 없다. 한편 폴란드 지방의 민족들은 전체적으로 로마 제국 등 라틴 문명권에 동화되지 않은 채로 살아갔으며, 996년에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모두 이교를 믿었다.[14] 이후 폴란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 가톨릭이 전래되기는 하였으나, 이교의 영향력은 1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15] 피아스트 왕조폴란드는 10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피아스트 왕조 하에서 하나의 단일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폴란드의 첫 지도자는 미에슈코 1세로,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966년 경에는 폴란드 전체를 개종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몇 십년 동안 이교를 믿었던 폴란드인들이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1000년에는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 국왕이 미에슈코 1세의 정책을 받들어 수도이던 그니에즈노에서 그니에즈노 평의회를 열었으며, 폴란드 각지에 주교좌를 설치하여 기독교 선교 정책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이교의 세력은 강성하였으며, 사람들이 기독교에 반발하자 1038년의 카지미에시 1세 오드노비치엘 국왕 시절에는 수도를 그니에즈노에서 크라쿠프로 옮기기까지 하였다.[16] 1109년에 볼레스와프 3세가 훈츠펠드에서 독일의 하인리히 5세를 꺾었으며, 독일이 폴란드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내었다. 1138년에는 당시 국왕이던 볼레스와프 3세가 아들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나누어주면서 폴란드는 여러 작은 공작령으로 나뉘었다. 1226년에는 피아스트 가문의 공작들 중 하나였던 콘라트 1세가 튜턴 기사단에게 자신이 프러시아의 이교도들과 싸우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으며, 튜턴 기사단은 이교도들을 정벌한 이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폴란드 지방에 머물렀다. 1264년에는 유대인들을 위한 법령을 반포하였고, 유대계 민족을 위하여 막대한 자치권을 허락해주면서 거의 ‘나라 안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였다.[17] 13세기 중반에 피아스트 왕가의 헨리크 1세와 헨리크 2세를 거치면서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던 폴란드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하였으나, 동쪽에서 몽골 제국이 쳐들어오고 레그니차 전투에서 헨리크 2세가 전사하며 통일 폴란드의 시도는 막을 내렸다. 1320년에는 여러 공작들이 난립하던 와중에, 드디어 브와디스와프 1세가 폴란드를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브와디스와프 1세는 왕위를 그의 아들인 카지미에시 3세에게 물려주었다. 카지미에시 3세는 국가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유대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를 허락하였으며 법전을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는 등 수많은 문화 진흥 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하여 폴란드 역사상 최고의 군주라는 찬사를 받았다.[18] 한편 카지미에시 3세는 지속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을 폴란드 내에 세우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교황 우르바노 5세가 크라쿠프 대학의 설립을 인가하면서 폴란드의 문화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된다. 카지미에시 3세는 그의 아버지와 그가 폴란드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해준 귀족들에게 막대한 이권을 주었으며, 귀족들을 위한 법전을 제정하였으며 아예 귀족들의 법적 지위를 국법에 못박았다. 이후 카지미에시 3세가 1370년에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피아스트 왕조도 끝난다. 13세기와 14세기 동안 수많은 독일계, 덴마크계,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들이 폴란드로 이주해왔다. 또한 카지미에시 3세 재위기에 폴란드에서 유난히 친유대 정책을 펼쳤기에, 유럽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과 아르메니아인 등도 폴란드로 많이 이주했다. 한편 1347년부터 1351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폴란드에 큰 피해를 미치지는 않았는데, 이는 폴란드의 카지미에시 3세가 전염병 발발 소식을 듣고 국경을 봉쇄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19] 야기에우워 왕조피아스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카지미에시 3세는 적자를 남기지 못했고,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 국왕이 계승했다. 그러나 폴란드의 영주들이 헝가리와의 공동 통치 상태를 꺼렸고, 이로 인하여 헝가리 국왕이 1383년에 죽은 이후에는 앙주 왕가의 야드비가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하였고, 1386년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가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야기에우워 왕조는 중세 말부터 현대 초까지 폴란드를 통치하며 근현대 폴란드의 기틀을 잡은 왕조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결성하여 1368년에 결성된 이후 약 400여 년 동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지를 포함한 폴란드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다스리게 된다. 당시 폴란드와 인접한 발트 해 유역에는 콘라트 1세가 이교도 정복을 위해 도움을 청한 이래 머물러 살고 있던 튜턴 기사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이들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고, 1410년의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튜턴 기사단에게 승리를 거두면서 튜턴 기사단에게 압도적 우세를 점했다.[20] 이후 13년 전쟁을 치른 후, 드디어 카지미에시 4세가 튜턴 기사단을 완전히 정복하면서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에 복속되게 된다. 야그에우워 왕조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유역에도 그 손을 뻗쳤으며,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대치하며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다.[21] 동쪽으로는 리투아니아가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폴란드는 점차 농경에 기반을 한 봉건제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귀족이 대토지를 소유하며 그 권력이 대단히 강했으며, 나중에는 ‘니힐 노비’를 제정하여 대부분의 입법권을 국왕에게서 귀족 세력으로 가져오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국정은 점차 대귀족들이 장악하였다. 이 시기를 귀족들의 황금시기였다고 하여 ‘황금빛 자유’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이 시기에 유럽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종교 개혁 시기에 폴란드는 타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종교적 관용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로 인하여 16세기 전반에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 관련 갈등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22] 이탈리아에서 발원한 르네상스도 점차 폴란드에게 영향을 끼쳤는데,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 재위기인 야그에우워 왕조 후기에 대대적인 계몽 운동이 일어났으며, 폴란드의 문화적 황금기를 맞았다. 1543년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주창한 책이자 현대 천문학의 기틀을 놓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발표하였으며, 또한 유명한 고전시인인 얀 코하노프스키도 이 때 활동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은 튜턴 기사단 정복 이후 세력을 크게 불려나갔다. 1569년의 루블린 연합으로 선거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거대한 국가인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만들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주로 귀족층들에 의하여 통치되던 나라로, 귀족 중심의 의회가 국왕을 제치고 대부분의 권력을 차지하였다. 한편 1573년에는 폴란드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으나, 농노의 경우에는 여전히 귀족들의 탄압에 시달렸으며 각종 제재도 굉장히 많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성립된 이후, 폴란드에는 번영의 시대가 찾아왔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럽의 핵심 강대국들 중 하나로 떠오르며 그 문화의 꽃을 피웠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중동부 유럽에서 거의 백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서부 등지에 유럽 문화를 전파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6세기와 17세기 동안 지그문트 3세와 브와디스와프 4세의 재위기에 러시아, 스웨덴, 오스만 제국 등 강대국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여러 차례 코사크인들의 반란도 겪었다.[23] 폴란드 군대가 클루시노 전투에서 러시아를 꺾고 모스크바까지 점령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1611년에는 러시아 차르가 폴란드 국왕에게 조공을 바치기까지 하였다. 데울리노 조약을 체결한 직후, 1620년대의 폴란드 영토는 거의 백만 제곱 킬로미터에 달했다. 17세기 중반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본 정치 체제였던 귀족 과두정이 점차 균열을 일으켰다. 부정부패와 음모가 들끓었으며, 귀족 세력들은 서로에 대한 견제에만 몰두하며 정작 국가의 권력은 약해져만 갔다. 1648년에 코사크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차르에게 잃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인들이 쳐들어와 폴란드의 중심부를 관통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후 17세기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하락세는 가속화하였고, 100여 년 동안 전체 1,1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400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나 전쟁으로 사망하였다.[24] 다만 얀 3세의 재위기에 잠시 군사력을 다시 회복하였으며, 1683년에는 빈 포위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무공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얀 3세의 사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황금기는 마침내 완전히 끝났으며 폴란드는 지속적인 전쟁과 경제 파탄으로 신음하기 시작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쇠락세로 접어들었으며,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며 중앙 정부는 지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하였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파벌을 만들어 싸웠고, 베틴 가문의 유약한 아우구스트 2세와 아우구스트 3세가 연달아 재위하며 국왕의 권력은 갈수록 약해졌다. 또한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대북방전쟁 이후 급격히 성장하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상대적으로 더욱 약해졌다. 18세기 후반에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대대적인 내부 개혁에 착수하였고, 이후 경제가 상당히 회복되고 인구가 늘어나며 교육의 질도 많이 개선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또한 당시 수도였던 바르샤바가 역사적으로 폴란드 1의 항구도시였던 그단스크의 경제력을 능가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떠올랐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몰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폴란드 분할1764년에 치러진 폴란드 국왕 선거에서,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스타니스와프 국왕은 입헌군주제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인물이었으며, 근대적 개혁에도 의지가 있는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때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의 정치적 동맹들 중 하나였으며, 러시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였다. 국왕이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유화적인 자세를 보이자, 1768년에 바르 동맹이 결성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러시아로부터 지켜내고 귀족들의 특권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폴란드 국왕과 러시아를 몰아내고자 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같은 개혁 시도로 위기감을 느낀 외세가 폴란드 내부로 밀고 들어왔고, 1772년에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1차 폴란드 분할을 주도하였다.[25] 이 사건으로 폴란드는 영토의 30%를 빼앗겼으며,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국민들이 폴란드 국적을 빼앗겼다. 1773년에는 폴란드 국왕이 유럽의 첫 정부 교육 정책인 국가교육조서를 반포하였으며, 1783년에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학대가 전면 금지되었다. 스타니스와프 국왕은 1788년 8월에 의회를 개회하였으며, 유럽 최초의 근대 헌법인 5월 3일 헌법을 채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헌법이 담고 있던 혁명적 내용들과,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는 내용에 경계심을 가진 폴란드 내의 귀족 세력들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다시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완전히 해체시켜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 귀족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러시아에 도움을 청했고, 1792년 5월에는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 국경 내부로 쳐들어오며 폴란드-러시아 전쟁이 터졌다. 폴란드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방어전을 펼쳤으나, 패색이 짙어지고 국왕이 주화론자들에게 설득당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끝났다. 친러 성향의 귀족들이 정부를 장악하였으며, 폴란드의 재건을 두려워한 프러시아와 러시아는 결국 2차 폴란드 분할을 통하여 거의 대부분의 폴란드 영토를 빼앗아 갔으며 반속국 상태로 만들어버렸다.[26] 또한 1795년에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반러시아 성향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는 이를 빌미로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였으며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마지막으로 3차 분할하여 지도에서 폴란드 자체를 지워버렸다. 반란기폴란드가 외세에게 완전히 멸망당하고 난 이후,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폴란드에서는 수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1794년에는 폴란드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실패한 봉기였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장군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봉기를 이끌었던 코시치우슈코 장군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 장군 하에서 싸우기도 했으며, 대중적으로 인기도 많았으며 군재도 있었다. 그러나 이조차도 러시아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으며, 그마저 러시아 군대에게 진압당하자 폴란드는 이후 123년 동안 외세에게 지배당하게 된다. 1807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시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을 만들어 폴란드인들의 국가를 다시 세웠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하자, 폴란드는 1815년의 빈 회의에서 다시 승전국들에게 찢겨 나갔다.[27] 동부 지역은 러시아의 차르가 폴란드 입헌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다스렸으며, 이 곳에는 그나마 자유주의적인 헌법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차르는 점차 시민권을 탄압하였으며, ‘폴란드’라는 이름 빼고는 거의 합병과 동일한 정책을 펼치며 폴란드 독립운동을 막았다. 한편 프러시아는 차지한 폴란드 영토에 대대적인 독일화 정책을 펼쳤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령 폴란드는 상대적으로 탄압이 덜해서, 특히 크라쿠프 자유시 등에서 폴란드 문화가 흥성했다. 외세 통치기 동안 폴란드인들에 대한 동화 작업과 탄압이 수없이 가해지자, 점차 지하에서 여러 봉기들이 조직되어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1830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사관생도들의 주도로 11월 봉기가 일어나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군을 바르샤바에서 쫒아내 북쪽으로 일시 후퇴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 약 7개월 동안 폴란드 반란군은 러시아 군대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프랑스나 미국과 같은 전통적 우방들이 협조를 거부하고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도 자국령 내에서의 반란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영토를 통한 물자 수송을 거부하면서 그 힘이 약화되었다. 결국 폴란드인들은 봉기 실패를 받아들였으며, 러시아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 봉기가 진압되자 폴란드 입헌왕국의 헌법마저도 사라졌으며, 러시아 제국에게 합병되는 수순을 밟았다. 유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던 시대인 1848년 혁명에서 폴란드인들도 봉기를 일으켰으며, 프러시아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단순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나, 이후 프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하는 등 사태가 격화하며 무력 투쟁으로 바뀐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혁명은 실패하였으며, 프러시아령 폴란드였던 포센 대공국이 완전히 프러시아에 병합되었다. 1863년에는 또다시 봉기가 일어나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젊은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군대의 징집령에 반발하여 1월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폴란드 정치인들과 군 장교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너무나 수적 열세였으며, 외국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게릴라전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으며, 주요 전투에서 승리한 적은 거의 없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한 무력 저항이 여러 차례 무력화되는 것을 지켜본 폴란드 시민들은 결국 무력 저항을 포기하고 경제적, 문화적 자강 운동을 펼치는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후 폴란드 입헌왕국은 19세기 말에 급격히 산업화의 길을 걸었고, 러시아 제국 내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발전한 지역으로 떠올랐다.[28] 비록 폴란드가 이 시기에 외세에 지배당하면서 정치적 탄압을 받기는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대대적인 산업화와 현대화가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하다.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에 대대적 경제 재건 정책을 펼쳤고, 특히 실레시아, 동 포메라니아 등지에서 공업의 발달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나중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세워졌을 때에도 이 지역들이 공화국의 최고로 발달된 지역이었다고 한다.[29] 폴란드 제2공화국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그 전쟁에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망하자 승전국들은 당시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따라 폴란드가 다시 세워져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당시 2백만 명의 폴란드인 병사들이 각기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국가들을 위하여 싸웠으며, 이들 중 45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1918년 11월에 독일과 평화협정이 맺어지면서 연합국 세력이 완전한 항복을 받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폴란드가 독립을 얻어내었으며, 이 시기의 폴란드를 폴란드 제2공화국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등을 포함한 일부 국가들은 폴란드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다시 폴란드를 재점거하려 들었는데, 이로 인해 일어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 군대가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소비에트로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바르샤바 전투의 영향력은 상당히 컸는데, 이 전투로 인하여 공산주의가 유럽 쪽으로 침투하는 것을 잠시나마 막아낼 수 있었으며, 그 충격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조차도 공산주의의 세계화에 대하여 재고하게 만들 정도였다. 폴란드는 독립 이후 3국으로부터 돌려받은 영토들을 다시 하나로 융합하게 하는 데에 전력을 쏟았으며, 이전의 철도들을 제거하고 다시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 철도망이 깔렸으며 국제무역을 장려하여 국력을 신장하는 데에 온 힘을 들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3국은 폴란드 내부에서 소요를 방지하고 군기를 잡기 위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는데, 이후 세계대전이 끝나자 마침내 100여 년 만에 독립을 찾게 되면서 정치적인 대격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폴란드가 독립되고 난 직후, 수많은 해외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돌아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고국으로 돌아와 총리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해외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폴란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막 취임한 가브리엘 나루토비치 초대 대통령이 극우 민족주의자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폴란드 정계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30] 1926년에는 폴란드의 독립을 이끈 군사영웅이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5월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폴란드 정계의 혼란이 일단 가라앉게 된다. 피우스트스키는 극우, 극좌 세력들의 활동을 법적으로 금지하였으며, ‘치유’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 중도 세력들을 확장해나갔다. 그러나 1935년에 피우수트스키 총통이 사망하자, 다시 극단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1930년대 후반에 이르자 국내에서 공산주의, 극우 정당들이 판을 치면서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31]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7일에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9월 28일에는 바르샤바가 함락되었으며,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 나치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서로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한 것에 따라 폴란드는 2개로 나뉘어 각각 독일과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소련은 폴란드에 극심한 탄압을 가하면서 통제 정책을 펼쳤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에는 카틴 학살 등을 포함하여 조직적으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을 숙청하며 공포 정치를 펴갔다.[32] 독일도 폴란드를 혹독하게 탄압했다. 폴란드를 점령한 나치스 독일이 폴란드를 혹독하게 탄압하자 폴란드인들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연합국 세력에게 정보를 빼돌렸고, 나중에는 독일군의 에니그마를 해독하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폴란드 망명정부는 유럽에서 4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병력을 세계대전에 투입하였으며, 폴란드인들은 서부 전선에서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휘를,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의 지휘를 받으며 전쟁에 참여하였다. 서부권에서는 북아프리카 원정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동부권에서는 바르샤바와 베를린 점령에도 기여하였다고 한다.[33] 전쟁 내내 폴란드 국내에서도 수많은 반나치 무장단체들이 등장하여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대표적인 3대 저항단체들 가운데에 하나로 꼽히는 폴란드 국내군이 있었는데 세력이 가장 클 때에는 수십만 명의 병사들을 동원할 역량을 갖추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폴란드 망명정부를 다시 국내로 데려오는 것이었으며, 보통의 경우에는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성향이었다. 1944년 8월에는 소련이 바르샤바로 진격하기 직전에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켜 자주적인 폴란드 독립을 이루려 하기도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폴란드 점령지에 6개의 절멸수용소를 지었으며, 가장 대표적으로 트레블링카, 아우슈비츠, 마즈다네크 집단 수용소들이 있었다. 나치는 전 유럽에서 수 백만명의 유대인들을 실어와 이 집단 수용소에서 가스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에 폴란드 유대인의 90%에 달하는 3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사망하였으며, 180만 명에서 280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독일군에 의하여 죽음을 당했다. 이들 중 10만 명 정도는 교수, 변호사, 의사, 귀족 등 전통적인 폴란드의 엘리트 계층이었다.[34] 바르샤바 봉기 동안에만 15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살해당했으며, 1939년과 1941년 사이에는 15만 명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소련에 의하여 점령된 구역에서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또한 1943년과 1944년 사이에는 약 10만 명 정도가 볼히니아 지방에서 우크라이나 자치군(UPA)에 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폴란드는 세계대전 동안 6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의 6분의 1 이상을 잃으며 가장 높은 비율의 인구 피해를 본 국가가 되었으며, 이들 중 절반이 전통적 폴란드 부유계급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1945년에는 폴란드의 국경이 서쪽으로 대거 후퇴하였다. 소련은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폴란드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국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폴란드의 영토는 거의 20% 가까이 축소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폴란드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들이 고향을 떠나 이주해야만 했다.[35] 한편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도 이 영토는 다시 폴란드에게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신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되었다. 한편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는 오데르-나이세선이라고 하는 새로운 국경선이 확립되고 이 국경선을 통하여 이전의 독일 영토가 대거 폴란드에 편입되면서 폴란드 자체가 서쪽으로 옮겨갔던 것이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전후 처리를 위하여 승전국들이 개최한 얄타 회담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하여 결국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공산주의 폴란드 임시정부의 수립이 승인되었다. 이는 누가 보아도 런던에 자리하던 폴란드 망명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며, 이 행동을 폴란드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인 수많은 폴란드인들은 당연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1944년에는 스탈린이 처칠 총리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소련이 폴란드의 독립을 유지할 것이며, 민주적인 선거를 시행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폴란드의 속국화에 대한 의심을 풀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1945년에 공산당 감시 하에서 치러진 부정선거에서 승리하며 폴란드의 권력을 틀어쥔 직후, 결국 소련과 공산당은 폴란드 자치를 부정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내정 간섭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소련은 폴란드에 새로운 공산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인근의 공산 정권들과 합쳐 동구권의 핵심 구성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1940년대에 소련은 심지어 대독 전쟁에서 싸운 독립 영웅들까지 탄압하며 극심한 스탈린주의식 탄압 정책을 펼치며 국민들의 인심을 잃었고, 1950년대까지는 수많은 유혈 시위들도 일어났다. 새롭게 세워진 폴란드 공산정권은 국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전쟁 도중 점령한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편입하는 것을 허가하였으며, 붉은 군대가 폴란드 내부에 영구 주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36] 또한 수도인 바르샤바에서 조인된 바르샤바 조약으로 인하여 냉전이 극도로 심화하게 되면서 폴란드의 정치적 지위도 급격히 달라졌고, 폴란드는 서구권 국가들과는 급격히 멀어졌으며 반면 같은 공산주의 체제였던 동구권 국가들과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새로운 공산정부는 1946년 2월에 소헌법을 채택하였고, 1952년에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1956년에는 소련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탄압을 펼쳤던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대통령이 집권하였다. 고무우카 대통령은 비에루트 대통령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자유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정치범을 석방하는 등 일부 검열을 완화하기도 하였다. 한편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존속하던 기간 거의 내내 반공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권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여겨졌다. 1980년대에 갈수록 경제가 악화되고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폴란드 내부에서 점차 반정부적인 분위기가 강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자치노동조합 '연대‘가 설립되었으며, 점차 반정부 성향을 띠며 정부와 대척점에 서있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연대는 1980년대의 탄압과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활동하였고, 나중에는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정당인 폴란드 연합노동자당을 꺾고 1989년의 부분적 자유선거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연대의 대통령 후보이자 당 지도자였던 레흐 바웬사는 결국 1990년의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며, 폴란드 공산당의 해체는 동구권에서의 공산주의 봉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자유화 이후1990년대 초에는 레셰크 발체로비치 재정부 장관이 대대적인 충격 요법을 통하여 공산주의식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역시 타 구 공산권 국가들과 유사하게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1995년에는 경제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회복하면서 1989년 이전의 GDP를 회복한 첫 구 공산권 국가로 떠오르기도 했다.[37] 공산주의 정권의 붕괴 이후 폴란드에서는 발언의 자유, 인터넷의 자유, 시민권, 정치권 등이 크게 신장하였으며,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1년에는 비셰그라드 그룹에 가입하고, 1999년에는 체코 및 헝가리와 함께 NATO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2003년 6월에는 국민 투표를 열어 EU에 가입할 지에 대한 여부를 선거에 부쳤고, 이에 가결되어 2004년 5월 1일에 정식 회원국으로 참여하였다. 다만 유로존에는 가입하지 않고, 기존 즈워티를 이용하고 있다. 폴란드는 2007년에 솅겐 조약에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폴란드의 서부 국경과 접하고 있는 EU 회원국 대부분과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졌다. 반면 동부 국경에 접하고 있는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은 EU에 가입하지 않아서 마음대로 이동하기에는 제약이 있다.[38] 오히려 이 동쪽 국경선은 감시가 더욱 강화되는 중인데, 이로 인하여 ‘유럽의 요새화’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폴란드는 군사력 강화 목적의 일환으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비셰그라드 군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며, 약 3,000여 명의 군인들을 즉시 파병할 수 있는 상태로 두고 있다.[39] 2010년 4월 10일에는 폴란드 대통령인 레흐 카친스키와 그와 동행한 89명의 폴란드 고위 공직자들이 카틴 학살을 추모하기 위하여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에는 여당이자 보수 우익 정당이었던 시민연단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2012년에는 유럽우주국에도 가입하였다. 2013년에는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폴란드 국무총리인 도날트 투스크가 유럽연합 상임의장에 지명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총리직을 사임하고 상임의장직에 올랐다. 2015년과 2019년 폴란드 총선에서는 보수적인 법과 정의당이 승리를 거두었고,[40] 법과 정의당이 점차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EU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었다. 2020년 폴란드 대선에서는 법과 정의당 출신의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자연 환경![]() 지형국토는 동서로 689km, 남북으로 649km 뻗어 있는데 북쪽은 발트해와 접한다. 약 90%의 국토가 300m 이하의 평탄하고 완만한 지형으로서 국토 대부분이 유럽 대평원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남쪽 국경에 있는 수데티산맥과 카르파티아산맥을 제외하고는 100m 이상인 곳이 드물며, 중남부의 타트리산맥에는 해발 2,499m의 폴란드 최고봉 리시산이 있다. 중부 및 남부의 일부 지역은 토질이 비옥하고, 북부와 서부에는 황지와 이탄지가 많다. 수데티산맥과 카르파티아산맥은 비스와강, 오드라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폴란드에서 가장 긴 강인 비스와강(전장 1,068km)은 국토 중앙을 가로질러 흘러 광대한 유역평야를 이루고 호소(湖沼)가 산재하는 하류 지역에 운하를 발달시키고, 발트해 여러 항구와 내륙 여러 시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동맥을 이루고 있다.[41] 오데르강(오드라강)은 서쪽 국경을 따라 흐른다.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을 흐르는 내륙 수상교통의 동맥으로 주요 - 도시 근처의 지역 슈체친. 수송물자는 슐레지엔의 석탄·철광석 등과 공업제품이다.[42] 기후기후는 온대에 속하여 서유럽의 해양성 기후와 동유럽의 대륙성 기후 사이가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강수량은 가장 많은 남부 국경 산악지대가 1,000∼1,100mm, 가장 적은 중부가 평균 600mm이다. 초춘(初春), 초동(初冬)을 합쳐 연간 6계절로 구분하며, 기온은 초봄과 가을에 0∼5°C, 봄·가을에 5∼15°C, 여름에 20-25°C 이상, 겨울에 0°C 이하로, 연평균 기온은 7∼10°C이다. 최저기온인 2월은 평균 약 영하 3°C , 최고의 7월은 약 19°C이다. 지역적 격차는 적으나, 북동부와 남부산지는 평균보다 기온이 낮다. 또한 겨울철 2∼3개월간은 하천이 언다. 삼림도 서유럽의 활엽수림으로부터 동유럽의 침엽수림 사이의 점이 지대로, 침엽수림이 발달하고 서·남부에는 활엽수림도 섞이며, 진귀한 바이슨(들소)이나 각종 조수류를 볼 수 있다. 삼림 면적은 국토의 약 1/3을 차지한다.[43] 정치![]() 폴란드의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삼권분립에 기초한다.(헌법 제10조 1항) 폴란드의 행정부는 대통령과 각료회의로 구성된다.(헌법 제10조 2항) 대통령은 직선제로 선출하며, 임기는 5년, 2회 연임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국가 원수로서 최고 대표자일 뿐 아니라 국정운영의 지속성을 보장한다.(헌법 제126조 1항) 총리는 각료회의의 수장으로서 정부의 대내외 정책을 수행한다.(헌법 제146조 및 148조). 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며 임명 후 하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형식적으로는 총리 및 각료를 대통령이 임명하나, 실제로는 총리가 하원의 신임을 받고 하원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게 되어 있어 국가권력의 집행상 실질적인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44] 직선제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대내외에서 국가 최고대표자로 정상회담을 가진다.[45] 의회의 형태는 양원제로 상원 100명, 하원 46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은 중선거구제 비례대표제를, 상원은 중선거구제 다수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의회 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는 폴란드 하원은 국정 운영기관인 정부 구성에 직접 참여하며, 상원은 국정 운영 참여권 없이 하원의 견제기능을 주로 담당한다. 폴란드는 대의민주주의제를 채택한 민주공화국이며, 국가수반은 대통령이다. 행정부는 총리를 필두로 한 장관회의가 핵심 축을 담당하고 있다. 대통령은 총리의 요청을 받아 총리가 제출한 장관들을 임명하는 역할을 하며, 보통 총리와 장관들은 의회의 다수당 출신인 경우가 많다. 대통령은 5년마다 직접 선거로 선출되며, 현재 대통령은 법과 정의(PiS) 출신의 안제이 두다 대통령이며, 현임 총리는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이다. 현재 폴란드는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하원은 460석, 상원은 10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원은 비례대표제를 통하여 의원을 선출하나, 상원은 소선거구제를 통하여 의원들을 선출한다. 소수민족 정당을 제외하면 정당들이 하원에 입성하기 위한 최저득표율은 전체 투표수의 5% 이상은 되어야만 한다. 폴란드는 현재 삼권분립을 채택하고 있기에 사법부도 굉장히 독립적인 편이다. 대법원(Sąd Najwyższy)이 최고사법기관으로 버티고 있으며, 그 외에도 최고행정법원(Naczelny Sąd Administracyjny)과 헌법재판소(Trybunał Konstytucyjny), 국가재판소(Trybunał Stanu) 등이 따로 있다. 또한 하원은 상원의 동의 하에 옴부즈맨을 임명할 수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약 5년이다. 옴부즈맨은 행정부가 제대로 업무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하며, 혹시 폴란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국회에 보고하는 일을 주로 한다. ![]() 외교폴란드는 유럽연합 내부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로, 2020년 기준으로 유럽 의회에서 총 52석의 의석을 선출할 권한이 있다.[46] 폴란드는 2004년에 EU에 가입한 이후부터 정권의 교체와는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EU 내에서의 역할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외교 정책을 펼쳤다. 폴란드는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서, 삼수령 이니셔티브(Three Seas Initiative)의 최대 경제국이기도 하다. 또한 수도인 바르샤바는 EU의 국경감시 위원회인 프론텍스(Frontex)의 본부국이다. 폴란드는 유럽연합과는 상관없이 1999년부터 NATO, UN, WTO, OECD 등의 회원국이었다. 그리고 유럽경제지역, 국제에너지기구, 유럽평의회, 국제원자력기구, 유럽우주국, G6, 발트해 국가 이사회, 비셰그라드 그룹, 솅겐 협정의 참가국이기도 하다. 폴란드는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자마자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강화해 왔는데, 냉전이 끝나고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기 무섭게 동구권 시절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현재는 중앙유럽 내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폴란드는 2003년에 이라크 전쟁에 미국의 편으로 참전하였으며,[47]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초반부터 전쟁에 참전한 국가이기도 하다. 또한 폴란드는 NATO의 명분 하에 중동, 발트 해, 발칸 반도에도 군대를 파병하고 있다. 행정 구역![]() 폴란드의 행정 구역은 16개 주(폴란드어: województwo)로 구성되어 있다. 바르샤바를 포함한 5대 도시와 17개의 현으로 되어 있고, 도시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어 도시 인구가 전 국민의 약 50%를 차지한다. 마조비아(Mazowia) 지방의 중심인 수도 바르샤바와 ‘폴란드의 맨체스터’라는 별칭이 있는 공업 도시 우치가 국토의 중앙부에 있으며, 남부의 갈리치아(Galicia) 지방에는 노바 후타(Nowa Huta) 제철소가 있는 옛 수도 크라쿠프의 중세적인 옛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부 대(大) 폴란드 지방에는 상공업도시 포즈난이 있고, 슐레지아 지방에는 옛 독일 공업도시인 브로츠와프(Wrocław)가 있다. 그 외에 광공업도시 카토비체(Katowice)와 비스와강 하구에 위치한 그단스크(Gdańsk) 등도 중요한 도시이다.[48] 군사폴란드군은 폴란드 육군, 폴란드 해군, 폴란드 공군, 폴란드 특수군, 폴란드 영토방위군, 이 5개의 갈래로 나누어진다. 국방장관이 군통수권자이지만, 평시에는 대통령이 최고 군 통수권자이다. 이 때문에 평상시에는 대통령이 국방부장관과 차관급 인사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49] 2018년에 폴란드에는 약 144,142명의 군인들이 복무하고 있었다. 폴란드 해군은 주로 발트 해에서 활동하며, 인근 국가들과 충돌할 일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주요 활동은 해안 순찰 등이며 가끔씩 재난 구조 활동 등도 벌인다. 폴란드 공군은 정기적으로 발트해 훈련 작전을 벌인다.[50] 2003년에는 F-16C를 새롭게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으며, 2020년 1월에는 F-35 라이트닝을 구입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2020년 기준으로 135억 달러를 국방비에 쏟아부으면서 전체 GDP의 2%를 국방비에 투자하고 있으며, 2030년 경에는 2.5% 정도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한다. SIPRI에 의하면 폴란드는 약 4억 8,700만 유로에 달하는 무기들을 주로 미국, 칠레, 프랑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지에 판매했다고 한다. 폴란드군의 주요 임무는 폴란드 영토 방위이며, 그 외에 가끔씩 재외 국민들을 구호하는 임무를 맡기도 한다. 현재 목표는 NATO와의 군통수체계를 맞추어 일원화, 효율화하는 것이다. 현재 폴란드는 모병제를 채택하고 있다. 폴란드는 1953년부터 공산주의 시절 이래 UN의 평화유지임무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는데, 2003년에는 2,500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라크 남부에 파견하면서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하였고, 현재에는 중동, 발트 해, 발칸 등에 2019년 기준으로 약 1,650명의 군인들을 파병하고 있다.[51] 경제![]() 폴란드의 GDP는 현재 유럽연합 내에서 명목 GDP 순위로 따지면 6위의 규모이며, PPP로 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