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령(會寧)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두 왕자(임해군 · 순화군)와 여러 재신(宰臣)을 잡아
적을 맞아 항복하였다.
이로써 관남(關南)과 관북(關北)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 (무오)
이후 임해군과 순화군은 몇 차례의 협상 끝에 풀려났다.[8] 임해군과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인 김희철 또한 왜란 중에 전사하였다.[9]
왜란 이후
임해군은 왕자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만하고 난폭하게 행동하였으며, 남의 전택과 노비를 빼앗았다.[10] 심지어 임해군이 부리는 시정잡배와 가노들 또한 주인인 임해군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임해군은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거나 사소한 원한이 있는 자를 살해하였다.[11] 대신 유희서, 소충한 등이 임해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아내 이씨는 모욕을 당했다.
이처럼 광패한 행동을 일삼아 대간과 삼사, 사헌부가 그 죄를 묻고 강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다. 이후에도 임해군과 정원군, 순화군은 끊임없는 탄핵을 받았으나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최후
유배와 사사
광해군이 즉위하자, 임해군의 처벌과 추국을 요청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진도에 안치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되었다.[12] 이후 의금부는 광해군의 지시에 따라 역모 혐의의 관련자들을 추국했으며, 양사는 임해군을 비롯한 기자헌, 이흥로(李弘老) 등을 처단해야 한다고 9번이나 재차 진언했다. 또한 홍문관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진언했으나, 광해군은 이를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13] 그 후, 임해군은 교동으로 다시 유배 되었다.
사후
1609년(광해군 1년) 4월 30일[주 2], 이정표(李廷彪)는 임해군을 핍박하며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임해군의 자녀들이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 일본에 억류돼 승려가 되거나 일본 장수의 부인이 되었다는 소수의 의견이 있지만, 당시 억류된 왕족은 임해군과 순화군이며 사료에 왕손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고, 이를 확언할 사료와 자료가 전무하므로 자녀 억류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행적
임해군의 악행
임해군은 큰어머니를 꾸짖고 욕보이며 백성들의 전답과 재산을 갈취하고[15] 노비를 빼앗았다.[10] 수령을 욕보였을 뿐만 아니라 재상을 살해하였다. 시비가 붙으면 상대의 신분에 상관 없이 노복들을 시켜 구타하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일삼았으나, 선조는 임해군의 죄를 감싸주었다.[16]
임해군이 도적을 시켜 재신 유희서를 죽이자, 유희서의 고종 사촌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이 유희서의 아들을 사면해줄 것과 유희서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일들과 임해군의 처벌을 왕에게 아뢰었으나,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마침내 이덕형은 사직하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16]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 《선조수정실록》 38권, 선조 37년(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3월 1일 (신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남의 산택을 멋대로 차지하고, 재물이 많은 시장 상인에게 누명을 씌워 은포를 받아내었으며,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 아내를 억지로 궁노와 짝지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양주 백련사(白蓮寺)에서 시주받은 재물을 빼앗아갔으며, 자신의 궁가에 산채(山菜) 동물을 바치게 하였다.[17]
왕자들에게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40권, 선조 39년 9월 1일(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정묘)
선조의 여섯째 아들인 순화군은 광망하여 재물 갈취와 폭행, 수령관 모욕, 살인 등 임해군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제를 일으켜 마침내 선조에 의해 작위를 박탈당했는데, 1607년(선조 40년) 사망하였다. 실록의 순화군의 졸기에는 이러한 순화군의 행동이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고 기록되어있다.[19]
↑ 가나《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 (무오)
함경도가 적에게 함락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2월 14일 (신미)
임해군이 사병을 양성하니 절도로 유배해야 한다는 부제학 송응순 등의 차자홍문관 부제학 송응순, 전한 최유원, 응교 이지완, 부교리 기협, 부수찬 성시헌, 정자 목대흠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임해군 이진이 은밀히 이심을 품고 군병을 양성하고 무기를 저장한 의심스런 정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 와서도 여막에서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철퇴와 환도를 빈 가마니에 싸서 다수 반입하였으니, 가까운 집안에서 변이 발생할 조짐이 조석에 임박하여 있습니다.
대의에 의거 결단을 내려 절도에 유찬시킴으로써 종사의 안전을 도모하고 우애를 온전히 보존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나의 형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가 계사(啓辭)를 보고 안타까워 눈물이 흐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불행하게도 이런 공의(公議)가 유발되었으니,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선원속보》 선조자손록 권1臨海君珒宣祖大王第一男 壬申八月十四 恭嬪金氏出임해군 진은 선조대왕의 맏아들로 임신년(1572년) 8월 14일 공빈 김씨가 낳았다.
↑《선조실록》 19권, 선조 18년(1585년 명 만력(萬曆) 13년) 4월 17일 (무오)
임해군 이진이 허명의 딸을 맞아들이다왕자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이 【김빈(金嬪, 공빈 김씨)의 소생이다. 김빈은 김희철(金希哲)의 딸로 총애를 받았다. 숙의(淑儀)로 있다가 빈(嬪)에 봉해졌는데 임해군은 왕자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다.】 허명(許銘)의 【처음 입신(立身)할 때부터 칭찬할 만한 지조가 없더니, 혼인하던 날 이리저리 영구(營求)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왔다. 】 딸을 맞아들였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 (계묘)
임해군 이진은 폐단을 심하게 일으켰으나 광해군은 중외 사람들이 많이 따르다상(선조)의 맏아들인 임해군 이진(李珒)은 성질이 거칠고 게을러 학문을 힘쓰지 않고 종들이 제마음대로 하도록 놔두어 폐단을 더욱 심하게 일으켰다.
그러나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여 조정과 민간의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상이 가려서 세웠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 (계묘)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 (을사)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8월 23일 (갑진)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 (무자)
↑ 가나《선조실록》 131권, 선조 33년(1600년 명 만력(萬曆) 28년) 11월 25일 (을축)
순화군이 일찍이 임해군에게
‘나는 비록 경망하여 사람을 구타하지만 형이 남의 전택(田宅)이나 장획(臧獲, 노비)을 빼앗는 것보다는 낫다.’ 하였는데,
사람들도 이 말만은 그렇다고 여겼다.
대개 임해는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마구 빼앗았으니 그 악독함이 더욱 가혹하였다
↑《선조실록》 152권, 선조 35년(1602년 명 만력(萬曆) 30년) 7월 4일 (계해)
간원에서 임해군의 살인죄, 가례 도감의 준비 미숙 등을 조사토록 하다간원이 아뢰기를,
"임해군 이진(李珒)이 전 주부(主簿) 소충한(蘇忠漢)을 지척의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였습니다.
대낮에 아무 거리낌없이 살인을 했으니 국가의 법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에 따라 조사해서 율에 비추어 시행하게 하소서."
(중략)
↑《광해군일기》[중초본] 2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3월 2일 (기축)
임해군을 교동현으로 이배하여 안치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5권, 광해 즉위년(1608년 명 만력(萬曆) 36년) 6월 13일 (무진)
양사가 임해군 이진의 처벌을 주장했으나 다시 논하지 말라고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