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데팡당![]() 앙데팡당(프랑스어: 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은 1884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예술가 협회이며, 이 협회가 주관하는 무심사·무상금 원칙의 연례 전람회가 앙데팡당전(프랑스어: Salon des Indépendants)이다.[1][2] 개요앙데팡당전은 살롱 드 파리의 엄격한 심사 제도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하였다. 전시는 “심사위원도, 상도 없다”(sans jurys ni récompenses)는 강령 아래 누구에게나 개방되었고, 이를 통해 신인상주의, 나비파, 입체파 등 새로운 경향이 널리 알려지는 통로가 되었다.[1][3][4] 역사그루프 데 앙데팡당(Groupe des Indépendants)은 협회의 전신 격인 초기 작가 연대로, 1884년 5월 첫 전시를 주도하였고 같은 해 6월 독립 예술가 협회(Société des Artistes Indépendants)가 정식 조직되었다.[3] 초기 앙데팡당전에는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등의 작품—기존 공식 살롱에서 낙선했던 사례를 포함—이 전시되었다.[3] 1884년 제1회 앙데팡당전은 파리 샹드마르 일대의 전시관에서 열렸고, 1920년대 이후에는 그랑 팔레가 주요 개최 장소가 되었다. 최근에는 파리 내 다른 전시 공간(예: 파르크 드 라빌레트 인근 공간 등)에서도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3][1] 협회와 전시는 시대에 따라 개최지를 달리하며 대규모 발표를 이어 왔다.[2]
![]() ![]() 조직과 전시운영 주체는 앙데팡당(협회)이며, 이 협회가 여는 전람회가 앙데팡당전이다. 출품비는 있으나 심사·입선·수상 제도는 없다는 비경쟁 원칙을 정관의 핵심으로 유지해 왔다.[2][4] 살롱 분열과 동시대 살롱들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에서는 살롱 드 파리 체제의 경직성에 대한 반발과 개혁 움직임이 확산되며, 여러 살롱이 병존했다. 1890년대에는 프랑스 국립 미술 협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 전시(일명 샹 드 마르 살롱), 1903년에는 살롱 도톤느가 창설되었다. 이러한 다원화 속에서 앙데팡당전은 “무심사·무상금” 원칙의 독립 전시로 자리매김했다.[1] 영향앙데팡당전은 19세기 말~20세기 초 파리 미술계에서 새로운 양식의 확산과 신진 작가의 공개를 촉진하였다. 전시는 오늘날에도 파리의 주요 살롱 전시들과 함께 신작 발표의 장으로 기능한다.[1] 미국과의 관계앙데팡당전은 유럽 내부에서만 영향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위미술 제도에도 간접적으로 계승되었다. 1913년 아모리 쇼는 파리에서 알려진 마르셀 뒤샹, 앙리 마티스, 콘스탄틴 브랑쿠시 등의 작품을 미국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며 논쟁을 촉발했다.[5] 뒤샹은 1917년 뉴욕에서 독립예술가협회(Society of Independent Artists)를 공동 창립했는데, 명칭과 운영 원칙 면에서 파리의 ‘앙데팡당’ 협회를 직접 참조했다는 평가가 있다.[6] 같은 전시에서 뒤샹이 제출한 레디메이드 《샘》(Fountain) 사건은 미국 현대미술사에서 제도 비판의 전환점으로 기록되며, 앙데팡당전의 개방적 전시 모델이 미국 아방가르드 제도 형성에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6] 일본에서의 ‘앙데팡당전’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7년, 파리의 앙데팡당전을 본보기로 한 ‘니혼 앙데팡당전’(日本アンデパンダン展)이 창설되었다.[7] 이 전시는 문부성이 주도하던 권위적 미술전람회(문전·帝展·日展 등)의 심사 제도에 반발해, 프랑스 앙데팡당전의 원칙을 그대로 계승한 무심사·무상금 전시로 운영되었다. 1940~50년대 일본 신흥 미술가들에게 발표의 장을 제공하며, 특히 1950년대의 '구타이' 그룹이나 전위적 청년작가들의 실험 무대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8] 니혼 앙데팡당은 명칭과 운영 정신을 통해 파리 앙데팡당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강조했으며, 해외 체류 경험이 있던 후지타 쓰구하루, 쿠니요시 야스오 등 일본 출신 작가들의 전시 경험도 이러한 전통의 배경이 되었다.[9] 이 전통은 훗날 한국 단색화 작가들이 일본 전시(예: 1975년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동경화랑)를 통해 국제적으로 소개될 때 일본 미술계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적·문화적 토대 가운데 하나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제시된다.[10] 아시아에서의 수용과 변주앙데팡당의 무심사·무상금 원칙은 프랑스 내 제도 개혁을 넘어, 아시아 현대미술 제도의 형성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수용·변주되었다. 일본·한국은 직접적으로 ‘앙데팡당전’을 도입했고, 홍콩·대만·싱가포르 등지에서는 자체 조직 전시나 청년 그룹 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사한 실험을 이어가며, 표현적 실험과 발표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들 공간은 공식 전시 제도의 심사 및 상금 중심 관행에 대한 대안 내지는 보완으로 작동하였고, 앙데팡당의 정신과 정서적으로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즉, 일부 지역은 프랑스 전통의 제도적 모델을 직접 계승했으나, 다른 지역은 “심사 배제·실험 장려”라는 정신을 변용하여 각자의 맥락에 맞게 적용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한국 작가들의 프랑스 유학생활과 문화적 영향본 절은 주로 1960~70년대 한국 작가들의 프랑스 체류 경험과 그 문화적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미국 및 일본에서의 수용과 변주는 각각 미국과의 관계와 일본에서의 ‘앙데팡당전’,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수용과 변주 절에서 다룬다. 박서보 등 일부 초기 단색화 작가들은 프랑스 체류를 통해 앵포르멜 이후의 경향, 누보 레알리즘, 이브 클랭 등의 실험을 접했다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경험은 귀국 이후 한국에서의 재료·물성에 대한 관심, 절제된 반복과 행위성, 그리고 심사 중심 전시 제도에 대한 비판적 인식 등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제시된다.[20] 같은 맥락에서 1970년대 국내 전시 운동(예: 서울현대미술제, 에꼴 드 서울)은 국제 교류 확대와 젊은 작가 발굴을 지향했고, 무심사·무상금 전시 형식과 결합하여 제도권 중심 관행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로 평가된다.[21][10] 한국에서의 ‘앙데팡당전’대한민국에서는 1970년대 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앙데팡당전’이라는 무심사 독립전 형태의 전시가 열렸으며, 제1회는 1972년에 개최된 뒤 연차 전시가 이어졌다.[13][22] 당시 전시는 기존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중심의 보수적 심사제도와 미협 중심 전시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공개 출품과 국제 교류를 염두에 둔 대안적 모델로 기능했다는 해석이 제시된다.[10] 국내 용어사전은 이 전시 형식을 ‘무심사·무상금 전시’로 정의한다.[4] 또한 『미즈에』 1975년 3월호에는 ‘제2회 한국 앙데팡당’ 관련 르포가 수록되었다.[23] 1972년 제1회 전시는 한국미술협회 주최의 무심사 독립전으로, 당시 파리비엔날레 등 국제전 출품 작가 선정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 심사위원으로 재일 작가 이우환이 초청되었으며, 이동엽과 허황의 백색 계열 작업이 주목을 받았다.[10] 1973년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으로 이전한 뒤에도 ‘앙데팡당’전은 지속되었고,[10] 이 흐름은 1975년 '서울현대미술제'와 ‘에꼴 드 서울’의 창립으로 이어져 젊은 작가 발굴과 국제성 지향을 구체화했다. 같은 해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개의 흰색》 전시는 권영우·박서보·서승원·이동엽·허황을 소개한 초기 해외 사례로, 이우환·야마모토 다카시·나카하라 유스케 등의 네트워크가 매개한 것으로 평가된다.[10]
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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