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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이 문서는 대한민국보수주의 사상에 대해 다룬다.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우파에 속하며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사유재산권, 국가안보, 반공주의, 법치주의, 점진적 개혁을 핵심적인 가치로 여긴다. 이 외에 민족문화, 전통, 애국심, 애향심, 예절, 부모공경, 경로사상, 일부일처제, 낙태반대, 동성혼인반대 등 기존 가족제도도 옹호하는 입장이다.[1][2][3]

오늘날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계보를 잇고 있는 주요 세력에는 보수정당이 있다. 1870년대 개화파를 시작점으로 해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보수정당은 정치·경제·안보 분야에 관해서는 이념을 확고히 하였고, 사회·문화 분야에 관해서는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4][5][6][7][8][9][10][11][12][13][14][15][16][17][18][19][20][21][22][23][24][25][26]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는 "자유민주주의나 시장경제 이념이 해방 후 미군정 당국에 의한 친미정권 수립을 계기로 비로소 한반도에 도입됐다거나 오늘날 한국의 보수세력이 지킬 가치와 이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일부의 주장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바탕이 되는 공화제(공화주의 이념)가 안창호 등 개화파 3세대가 주축이 돼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된 공립협회나 1907년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인 신민회 등을 통해 제기된 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채택된 데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남 교수는 덧붙였다.[27]

역사

개화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의 시작을 1870년대에 태동한 개화파로 본다.[1][27]

1896년 7월 2일 한성부에서 서재필·이상재·이승만·윤치호 등 개화파가 주도하고 안경수·박정양 등 정부 고위관료와 남궁억·안창호 등 지식인이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 조직되었다. 이완용도 몸 담았던 적 있으나 제명당하였다. 독립협회의 결성을 주도한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러시아·프랑스·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의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당시 개화파는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는 대로 진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1] 이는 당시 국가와 사회의 주류였던 수구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진보하자는 의미였다.

개혁시대에는 부득불 파괴방법을 맹렬히 실행해야 부패한 국가와 부패한 사회를 개량하리라 하나 각국의 혁신사에 대하여 그 경험의 실제를 연구한 즉, 실로 파괴주의는 완전한 이익이  없고, 보수주의로 진보함이 극히 좋은 방침이 되는 줄로 사유하노라…현재 국내 물정으로  논단하건대 수구파가 대부분이요 구신파(求新派)는 소수이므로 진보를 위해서는 구신파가 수구파에게 충격을 주어 보수주의를 타파하려 하지 말고 그들을 이용할 방법을 취해 개량진보를 기도함이 완전한 방침이라. - 『황성신문』 1909년 11월 17일자 논설 "보수주의로 진보함이가량(佳良)한 방침" 中

1907년 4월, 이회영·전덕기·이동녕·이시영·이동휘·안창호·윤치호·양기탁·이경희·김구·최광옥·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단 조직 신민회가 조직 발전되었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 및 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공화제를 이상향으로 두었다. 신민회의 표면적 활동은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 등이 주 목적이었으며, 활동지원은 상동감리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주변 시장 상인, 개신교계에서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또한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훈련할 신흥무관학교 훈련기관 설립에 뿌리를 마련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파리 강화회담이 1919년 1월 18일에 개최되었다. 이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기한 민족자결주의에 전세계 독립운동가들이 고무되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지식인들 사이에는 독립운동 방식에 관한 대립이 생겼다(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무장독립론). 민족주의 세력은 계급(지주·노동자)을 따지지 말고 모든 조선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에 투쟁하자며 주로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하거나, 국내에서 비밀 항일결사 운동을 하거나, 해외에서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공산주의 세력은 일제 강점의 원인이 계급에 있다고 보고 일본 제국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주계급에 대해서도 계급투쟁을 하자며 주로 만주로 나가 항일파르티잔, 항일투사가 되었다. [출처 필요]

1919년 3.1 운동 직후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각지에 임시 정부가 수립된 뒤, 같은 해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 하에 상하이를 거점으로 대한국민의회, 상해 임시 정부, 한성정부 등 국내외 7개의 임시 정부들이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개편되었다.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하고, 정치 체제는 민주공화국으로 하였다. 대통령제를 도입하고 입법·행정·사법의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1920년 상하이에서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환영회(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장붕)

1920년 임시 정부 인사들이 이승만 임시 대통령의 현지 부임을 요청하자 이승만은 중간 기착지 하와이에서 기회를 엿보다 11월 16일 상하이 직행 화물선에 몰래 탔다. 1920년 12월 5일 푸둥에 도착한 이승만은 1921년 5월 29일까지 상하이에 머물렀다. 대한민국 보수주의의 양대거목인 이승만김구의 만남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28]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독립운동의 방법론(외교독립론 대 실력양성론 대 무장독립론), 이념(민주주의, 민족주의사회주의, 공산주의), 지역(기호파 대 서북파)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존재했다. 1919년 4월경에는 임정 내부에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무장독립론자들(박용만, 신채호, 이동휘 등)은 외교독립론자들(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등)을 맹비난하였다. 1919년 9월 10일,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사회주의 세력 내의 임정 내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같은 당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하게 되었고, 1921년 1월,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인해 임정 내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1921년 6월 28일, 소련붉은 군대가 한인 무장 독립군들을 포위 사살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이르쿠츠파와 간의 공산주의 권력다툼에 의해 민족주의 세력인 김좌진·홍범도·지청천 등의 대한독립군단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와해되었으며, 이에 다수의 민족주의 세력이 공산주의 세력에 등을 돌리고 반공주의를 갖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이동휘가 가담하고 있던 적기단도 적대시하였다.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봉합하고자 1921년 2월부터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시도하여 1923년 1월 3일에 어렵사리 개막하였으나 임시정부는 또다시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분열되었다. 1923년 6월 2일 김구는 내무부령 제1호를 선포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 [출처 필요]

1928년 11월 20일 김구이승만에게 보낸 서신.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

임시정부가 계파 갈등으로 극도로 위축되자 임정에 남은 소수의 세력들이 이승만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승만은 대통령제 임시 정부 제4기까지 유임되었으나 그 도중인 1925년 3월 23일 대통령직 탄핵 및 면직되었다.